제한속도 표지판은 분명 60이었고 내 차는 정확하게 시속 58킬로 정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내 앞에 줄지어 움직이는 거대한 트래픽의 흐름도 제한속도 내에서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 있던 포힐 드라이버가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렸다.
나의 법정 속도에 대한 항의성 경적이었다. 바싹 다가선 채 추월하는 차량의 운전석을 보니 의외로 중년의 여성 드라이버였다.
순간 불쾌했다. 이런 경우 대개 운전자들은 날카로운 경적 소리의 교환으로 감정 표현을 한다.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복한다는 탈리오의 법칙의 자연스런 발로이다.
나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거의 반사적으로 운전대를 잡은 오른 손이 경적 버튼 부위를 매만졌다.
갑작스런 무례한 자극에 놀란 나의 몸은 아드레날린을 대량으로 분출하고 있었고,
심장은 몇 초 후에 전개될 지도 모르는 ‘대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심박수를 올리고 혈관 속으로 피를 부지런히 펌프질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 몸에서 일어난 일차적 반응을 그러했다.
그러나 잠시 후 나의 이성은 감정을 향해 “그렇게 반응할 가치가 없다’ 고 충고하였다.
우선 내가 잘못한 사실이 없었고 바로 그런 올바름에 대한 확신 때문에 상대방의 비합리적 도발에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경적 버튼 위에 놓였던 손이 다시 운전대로 옮겨갔다.
나는 비합리적인 상황 속에서 지극히 합리적인 반응을 선택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행동했음에도 내 속 마음은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교통체증으로 거북이 걸음이 되어 버린 차 안에서 머리 속 신경회로들은 감정과 이성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이성으로 움직이는 걸까 아니면 감정으로 움직이는 걸까?
아니 이성과 감정이 대립했을 때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인간적인 모습일까?
나는 감정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것이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하고 싶다.
사람이 100% 이성에 의해서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그것은 로봇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모든 상황에 대해 가장 합리적인 행동지침을 프로그램 해 넣으면 로봇은 정확하게 그 지침대로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아니 사람은 이성으로만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로봇과 같은 기계적 존재가 아닌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성으로만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대체 감정이란 무엇인가?
우선 이성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능력이라면
감정은 일단 옳다고 판정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연료와 같은 것이다.
즉 이성은 자동차의 조향장치와 같은 것이라면 감정은 엔진 부분이다.
감정은 미적인 것과 추한 것에 대한 판단 기능이기도 하다.
이슬을 머금고 있는 장미꽃을 보면 아름답다는 감정이 생기고,
독을 품고 혀를 널름거리고 있는 독사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혐오감을 일으킨다.
또한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미워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한다.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감각기능이 다 목적하는 바가 있다는 가정 하에서 보면 감정 또한 그 기능이 분명 있을 것 같다.
동물에게 주어지는 모든 기능은 결국은 종족의 보존이라는 목표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의 보존을 위해 중요한 두 가지 행위 즉 먹이를 찾는 것과 이성을 찾는 일에 봉사한다.
감정이 종의 보존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독성이 없는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이성이 찾아 주었을 때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먹이 채집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촉구하는 에너지일 것이다.
영어로 로우드 레이지(Road rage)란 말이 있다.
도로상에서 차량 운전자끼리의 감정이 갑자기 비등하는 것을 말한다.
갑작스런 차선 끼어들기라던가, 반복적인 추월 행위라든가.
하여간 운전자의 감정을 자극하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도로 상에서 바로 보복을 당하기도 한다.
가끔 로우드 레이지로 인해 총상을 입고 사망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니….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미치광이의 행동이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은 합당한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도록 명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미친 짓을 하도록 하는 인간의 감정이 ‘종의 보존’에 기여하는 것이 과연 있기나 하는 것일까?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냉정을 회복하도록 촉구하는 이성의 목소리가 훨씬 ‘종의 보존’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말할 것도 없이 그렇다. 그러나 이성의 목소리만 갖고 살면 로봇이 된다.
가끔 정상궤도에서 이탈을 할 지라도 감정은 우리를 인간되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이성의 적절한 통제 하에 있을 때 우리는 정상적이고 또한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다.
감정과 이성이 적정한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이상적인 인간형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문제는 결국 균형이다.
감정이 자동차의 엔진 파워라면 이성은 자동차의 브레이크 시스템이다.
브레이크 기능이 고장 나면 자동차는 사고로 폐차처분 될 것이고,
엔진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자동차는 고철과 다름이 없다.
이 두 가지 기능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룰 때 자동차는 편린 교통 수단으로서 그 효용성을 입증하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라 본다. 이성으로만 치달으면 로봇과 같은 이상한 존재가 된다.
그렇다고 감정에만 이끌려 행동하게 되면 자신을 포함하여 주위 여러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해로운 존재가 된다.
사람에게는 이성과 감정 모두 필요하며 두 가지 에너지가 적절한 통제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서 사람다운 삶이 보장된다.
한국인은 특히 정적인 민족이라고 한다. 정이 많아 탈도 많다.
가끔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이상한 집단행동을 하여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기도 한다.
한 인간 또는 한 사회의 성숙도란 바로 이 두 가지 에너지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수준을 말할 것이다.
어제의 나의 행동을 반추해 보자. 그리고 그 행동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행동이 아니었나 반성해 보자.
너무 이성적으로 치우쳐 모든 것을 법대로 처리하려고 했다면 나는 건조하고 삭막한 인간의 모습을 보인 것이고,
너무 감정에 치우쳐 여과되지 않는 말들을 마구 뱉어 냈다면
나는 감정에 치우친 나머지 화목을 깨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인간이라는 종의 보존을 위해서 감정도 이성도 다 필요하다.
그러나 더욱 더 필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상반되는 힘의 균형이다.
결국 인류가 역사 속에서 이룩한 '진보'란 바로 이런 균형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궤적의 총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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