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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삼황오제 일인 ‘순임금’…단군왕검이 파견한 총독

선인풍류 2018. 12. 20. 21:56
 


 

성헌식의 ‘대고구리’…순임금 출생 진실

中 삼황오제 일인 ‘순임금’…단군왕검이 파견한 총독

중국 요임금, 10명의 아들 불구…혈통 전혀 다른 순임금에게 왕위 계승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6-02-01 18:34:31

 ▲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스카이데일리
백제 동성대왕은 두 차례에 걸쳐 중국 남북조시대의 최강자 북위의 기병 수십만을 격파했는데, <남제서>의 기록에는 당시의 전투상황이 “밤에 번개같이 들이치고 도망가는 것을 따라가서 베니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宵襲霆擊 乘奔追斬 僵尸丹野).”라고 표현되어 있다. 백제 동성대왕의 군사들 앞에서 북위의 기병들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북위가 백제에게 처참하게 참패한 기록이 있음에도 <남제서> ‘고구리전’과 ‘백제전’에 고의로 삭제된 부분 약 320자가 있다는 의미는 위 기록보다 더 심한 그야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치욕적인 상황이 기록돼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분은 최치원의 “고구리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병 100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연·노·제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다.”라는 기록과 뭔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북위의 수십만 기병을 격파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동성대왕이 논공행상을 함에 있어 “용양장군·낙랑(樂浪)태수 모유와 건무장군·성양(成陽)태수 왕무에게 작위를 제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낙랑은 산서성 동남부와 북부 하남성 일대이며, 성양은 하남성 복현(濮县)과 접하는 산동성 하택현 동북 50리에 있는 바로 요임금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 산동성 서부 하택시에 있는 요임금의 초라한 진짜무덤. [사진=필자제공]

요임금의 무덤에 대해서는 『수경주』에서 <제왕세기(帝王世纪)>를 인용해 “요임금을 제음 성양 서북 40리 곡림에 장사지냈다. <사기>에서 말하기를 주무왕이 동생 숙무를 성에 봉했다. 응소가 말하기를 그 후 성의 북쪽으로 옮겨갔는데 옛 성양이라 한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성양에 요총영태가 있는데 지금의 성양성 서쪽 2리에 요능이 있고, 요능 남쪽 1리에 요의 모친인 경도의 능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원문) 尧葬济阴成阳西北四十里,是为谷林。《史记》曰:武王封弟叔武于成。应劭曰:其后乃迁于成之阳,故曰成阳也。《地理志》曰;成阳有尧冢灵台,今成阳城西二里,有尧陵,陵南一里,有尧母庆都陵。
 
동성대왕이 북위의 기병을 대파한 장수들을 왕(태수)으로 봉했다고 지난 컬럼에서 언급했던 광양(廣陽), 대방(帶方), 조선(朝鮮) 광릉(廣陵), 청하(淸河) 등과 위 낙랑(樂浪)과 성양(成陽)을 지도에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즉 이곳들은 백제의 영토였던 것이다. 이런 백제가 어찌 한반도 충청도와 전라도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 동성대왕이 태수를 봉한 지역은 산서성, 하남성, 산동성 일대. 청색은 현 지명 [이미지=필자제공]

순임금은 조선의 단군왕검이 파견한 중국총독
 
중국에서는 요·순을 성군(聖君)의 대명사라 하며 그 시대를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세라고 일컫는다. <사기> 등 중국기록에는 요임금이 신하들이 추천한 순임금의 인간됨과 능력에 반해 스스로 왕위를 넘겨주었다고 하며 심지어는 순임금을 요임금과 함께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로까지 꼽고 있다. 참고로 통상 3황으로는 태호복희, 염제신농, 황제헌원을 꼽고 있으며, 5제는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당요, 우순을 꼽는다.
 
그런데 실상 중국의 삼황오제 모두는 동이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제헌원의 혈통인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임금 등은 원래 동이족 출신이었지만 나중에 화하족의 시조가 된다. 이와 달리 순임금은 그야말로 순수 동이족으로 분류되는데 하화족 황제의 후손 요임금은 10명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동이족 순임금에게 왕위를 넘겼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임금은 맏아들인 단주를 남방으로 추방해 제후로 삼는다. 단주가 거만하고 포악하고 항상 게으르고 놀기만 좋아했기 때문이다. 후에 요임금이 왕위를 순임금에게 넘기겠다고 하자 단주는 반란을 일으켜 부자간에 전쟁이 일어나는데 요임금이 두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한다.
 
부자간에 전쟁을 했다는 것은 정권쟁취 이외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또한 맏아들이 말 그대로 방탕했다면 요임금은 다른 9명의 아들 중 가장 똑똑한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수도 있었으나 혈통이 전혀 다른 동이족인 순임금에게 왕위가 넘어갔다는 것은 뭔가 커다란 외부의 압력이 작용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 아니겠는가.
 
하화족 요임금이 동이족 순임금에게 양위한 진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조선의 단군왕검이 보낸 신하인 우순(순임금)에게 정복당하고는 굴복해 어쩔 수 없이 정권을 빼앗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요임금을 정벌한 순임금이 요새말로 새로이 중국총독이 된 것이다.
 
 ▲ 요임금의 두 딸인 아황과 여영의 슬픈 전설이 서려있다는 상비죽. [이미지=필자제공]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두 딸을 주어 사위로 삼고는 여러 일을 맡겨 순의 사람됨과 능력을 시험했으며, 3년 후 순에게 천하의 일을 맡겼고 20년이 지나자 섭정으로 삼아 양위했다고 하는데, <부도지>에서는 요임금이 두 딸로 미인계를 써 순임금을 유혹했다고 하며, 중국의 <죽서기년>에는 순이 쿠데타를 일으켜 요를 폐위 감금했다고 나온다.
 
또한 <단군세기>에 “갑술 67년(B.C 2267) 왕검께서는 태자 부루를 파견해 도산(塗山)에서 우사공(虞司空=순)과 만나 오행치수의 방법을 전하고 나라의 경계를 정하니 유주(幽州)와 영주(營州)가 속했으며, 회대(淮岱)지방의 제후를 평정하여 분조(分朝)를 두고 다스렸는데 우순(虞舜=순임금)에게 그 일을 감독케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에 “단군왕검은 제요도당(帝堯陶唐=요임금)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天王=단군)은 마침내 우순(虞舜)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해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唐)나라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했다.”라는 기록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이렇듯 비굴했던 요임금의 무덤이 있는 곳이 바로 동성대왕 때 백제의 영역이었던 성양(成陽)인 것이다. 실제로 그곳에는 아직도 요임금의 진짜무덤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요임금이 당(唐)이라는 나라를 다스리던 치소가 바로 평양(平陽)으로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 일대이다. 요임금이 평양에서 먼 산동성 서부 성양에 묻힌 것을 보면 그는 순임금에 의해 쫓겨난 군주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 산서성 남부 임분시에 있는 요임금의 가짜무덤.[사진=필자제공]

그런데 중국정부는 이러한 요임금의 무덤을 산서성 임분시 동쪽에 만들어놓고는 그곳이 진짜 요임금의 무덤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그 무덤을 조선을 세운 단군 왕검의 능으로 보고 싶다. 왜냐하면 <단군세기> 1세 단군 왕검 93년 경자(B.C 2241) 기록에 “이해 3월 15일 단군께서 봉정(蓬亭)에서 붕어하시니 교외로 10리쯤 떨어진 곳에 장사지냈다.”라는 기록이 있고, <부도지>에 의하면 왕검이 부도를 잠시 비운 사이 요가 차지해 나라를 세우자, 왕검은 아사달로 옮겨가 조선을 세웠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