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현 기자 T===================================================
잊혀진 특보] 박근혜가 남자에게 빠져 정신을 못차리니 구해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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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박근령이 노태우에게 '충격적인 탄원서'를 보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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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소리 | | ㅣ 기사입력 | 2012/05/28 [0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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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1월23일 동아일보 17면에는 놀라운 기사가 하나 실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차녀 박근령이 당시 집권중이던 노태우 대통령 내외에게 탄원서를 보낸 것인데, 그 내용인즉 '언니 박근혜가 남자에게 최면이라도 걸린듯 빠져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으니 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 1990년 11월 30일 동아일보 실제 기사 ⓒ 동아일보 |
| 해당 기사에 따르면 박근령-지만 남매는 1990년 8월 '노태우 대통령 각하 내외분께 보내는 호소문을 청와대 민정수석실로 보냈고, 그 내용인즉 '사기꾼 崔太敏(최태민)을 엄벌해崔(최)씨에게 포위당해있는 언니 朴槿惠(박근혜)를 전직 국가원수 유족의 보호차원에서 구출해달라. 누나와 최씨와의 관계를 끊게 해달라' 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야말로 박근혜가 남자에게 빠져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데 우리 남매 힘으로는 안되니 대통령이라도 나서서 구제해달라는 창피한 내용이었다. 박근령 친필 '남자에 빠진 언니 좀 구제..' 탄원서로 알려진 (노태우)대통령 각하 내외분께 드리는 호소문 이라는 A4용지 12매 분량의 문서는 다음과 같이 시중에 알려져 있다.
▲ 박근령-지만 남매가 '우리누이 살려달라' 노태우에게 보낸 호소문 ⓒ 오마이뉴스 |
| 참고로 최태민 목사는 1912년 출생하여 1994년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까지 최태민 목사가 '박근혜를 등에 업고 부정축재를 하였다' '좋아 지낸다'는 소문이 끊임없었고, 월간조선 7월호의 보도에 따르면 1955년 5월 30일 다섯 번째 부인인 林모씨와의 결혼을 마지막으로 모두 5명의 부인과 사이에 3남 6녀를 두었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실제 70년대 박근혜는 아버지 박정희에 의해 서울시장 양택식의 아들과 약혼을 하였던 바가 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가 결국 결혼하지 못했다. 박근혜-최태민 목사 사이에 '아이가 미국에 가있다'는 등의 온갖 루머가 2007년 박근혜-이명박 대선 레이스 당시에게 크게 불거졌었다, 당시 경선주자 였던 이명박도 '최태민 비리 왜 감싸냐, 박근혜 일가 부동산 최태민 차명재산 아니냐? 박근혜 불가론'을 펴 박을 큰 곤경에 빠뜨렸던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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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민 일가 부동산, 박근혜 차명재산 아니냐"이 캠프의 맞불
"박 후보, 입만 열면 거짓말"... 박 캠프 "근거없다" 일축
07.08.16 18:14l최종 업데이트 07.08.16 18:46l
| 이명박 캠프가 박근혜 후보에게 역시 '차명재산 보유 의혹'으로 맞불을 놨다. 과거 박 후보와 가까웠던 고 최태민 목사 일가의 재산형성 과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한 박 후보를 향해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며 비난 수위를 높였다.
박 후보 측은 "우리가 해주고 싶은 말"이라고 맞받았다. 최 목사 일가의 차명재산 의혹도 "근거 없다"는 반응이다.
이 캠프 "가난했던 자식들이 어느날 갑자기 재산가"
이 캠프의 이재오 의원은 16일 오후 기자회견을 자청해 최태민 목사의 딸 최순실씨 재산의 차명보유 의혹을 제기했다.
이 의원은 검찰을 향해 "이 후보에 대해선 집요하게 (수사 정보를) 흘리면서 최순실씨 재산이 누구의 차명재산인지 그 의혹은 왜 밝히지 않느냐"며 "(최 목사의) 가난했던 자식들이 어느 날 갑자기 빌딩 소유주가 되고 몇 개의 건물을 가진 수백억대의 재산가가 됐다면 이것이 더 의혹이 많은 게 아니냐"고 주장했다.
이어 이 의원은 "정상명 검찰총장이 스스로 정치권력의 하수인이란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최씨 일가의 재산이 누구의 것인지, 차명 보유 의혹을 밝혀 중립임을 입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박 후보에 대해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며 정면으로 공격했다. 이 의원은 "박 후보는 경선 시작 이후 6개월간 입만 열면 거짓말이다. "모든 것을 선거 공작으로 돌리면서 '선거 때니까 이렇게 해도 되겠지' 하고 말하지 말고 단 한마디라도 진실된 얘기를 해달라"고 비꼬았다.
박 후보 측의 사퇴 주장을 두고도 과거 박 후보의 탈당 전력을 거론하며 "또 탈당병이 도진 것이냐"고 공세를 폈다.
이 의원은 "(박 후보 측의 대응은) 누가 봐도 '경선 불복→경선 불참→탈당' 수순 아니냐. 지난 2002년 박 후보가 탈당했을 때와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며 "그러한 탈당병이 또 도진다면 당원과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캠프 "입만 열면 거짓말한 건 이명박"
박근혜 캠프는 "입만 열면 거짓말 한 게 누구냐"고 되받았다.
이혜훈 대변인은 이명박 후보의 과거 발언을 들춰내어 "이 후보는 이미 '위장전입 한 적 없다. 이명박을 죽이려고 세상이 미쳐 날뛰고 있다'고 말했지만 수일 만에 위장전입을 5번 한 것으로 판명됐고, '이라크 전쟁때 직접 들어가서 직원들 철수시켰다'고 주장했지만 이것도 사실이 아님이 드러난 바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면서 이 대변인은 "국민들은 (이 후보의) 거짓말 대행진에 이골이 났다"며 "이 후보의 변명을 곧이 곧대로 들을 국민은 없다"고 비꼬았다.
박 캠프는 최순실씨 재산 차명보유 의혹에 대해서도 "근거가 없다"고 일축했다.
김재원 대변인은 "최씨의 부동산 보유과정과 내역에 대해선 이미 당 검증위가 자체조사한 자료가 있다"며 "(이 캠프 주장은) 근거없는 소리"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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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측 "최태민 비리 왜 감싸나"… '박근혜 불가론' 총공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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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이명박 경선후보 측이 23일 박근혜 후보를 둘러싸고 제기돼 온 여러 의혹을 새삼 부각시키며 ‘박근혜 불가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 후보 측은 이날 대변인단을 총동원해 ‘전두환 6억원 생계비 지원’, ‘성북동 고급주택 무상 수수 및 세금 탈루 의혹’, ‘5·16은 구국혁명 발언’ 등 지난 19일 검증청문회에서 제기된 박 후보 관련 의혹이나 논란성 발언들을 공격했다.
박형준 캠프 공동대변인은 논평에서 “무결점의 소유자로 알려진 박 후보가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6억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라면서 “더 큰 충격은 당시 30평대 강남 은마아파트 30채, 현재 가치로 300억원에 상당하는 돈을 ‘생계비 명목’으로 받았다는 박 후보의 발언으로, 과연 서민들이 수긍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진수희 공동대변인은 논평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물론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중앙정보부, 대검 등 주요 국가기관이 모두 최태민(94년 사망) 목사의 국정 농단과 비리를 문제 삼고 있는데 유독 박 후보만이 ‘아니다’며 그분을 감싼 이유는 무엇일까. 무슨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느냐”며 박 후보의 ‘최 목사 감싸기’ 의혹을 문제삼았다.
황계식 기자 cul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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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검증(1탄)]대선출마를 선언한 박근혜의 의혹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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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에 대한 의혹 검증의 대단원 막이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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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소리 | | ㅣ 기사입력 | 2012/07/15 [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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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최태민 목사다.
횡령 14건, 사기 1건, 변호사법 위반 11건, 비리 13건, 여성추문 12건...총체적으로 쟁쟁한 분이시다. 자유당 시절엔 경찰관이었고 뭐 정식과정으로 된 목사도 아니고. 암튼 이 양반이 우리 근혜를 홀려서리(박정희의 표현) 구국여성봉사단을 결성했다.
즉, 박근혜가 최초로 사회활동(구국여성봉사단) 하게 된 계기가 이 양반 때문이다. 기업인을 구국봉사단운영위원으로 위촉,1인당 2000만원에서 5000만원 입단 찬조비를 받거나 월 200만원 운영비를 받았다.
그리고 행정기관의 지원을 바탕으로 동단위까지 조직을 확대, 300만명의 단원을 확보했단다. 늘 있는벼슬 팔아먹기와 공천 가지고도 300만원, 2500만원씩 뜯었다.
그렇게 횡령한 돈이 수십억. 최태민이 최초로 문제시 된 것은 김재규 때문이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쐈을 때 간접적인 이유로 든 것이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자식 문제 때문이라고 하는데...
김재규가 그것을 보고 '이건 아니다' 생각했고 문제 되었던 박근혜-최태민을 조사시켰단다. 그리고는 그것을 박정희에게 보고하니 육영수 사후 자식을 끔찍이도 아꼈던 박정희가 한쪽엔 김재규, 한쪽엔 박근혜-최태민을 앉혀놓고 친히 국문했다.
물론 박근혜는 아니라고 하니까 못 미더웠는지 검찰에도 수사를 지시했다는데 검찰 수사결과와 김재규 수사내용이 일치했다. 해서 당장 때려잡지는 못 하고 당시 구국여성봉사단 회장에(그때까지는 최태민이 회장) 박근혜를 앉히고, 최태민은 부회장으로 내려 앉히었다.
김계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박정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놈이 말이야, 근혜를 홀려가지고 내가 혼을 좀 내줬지.. 그년(박근혜)이 그놈한테 홀려 도무지 시집가려고 해야 말이지, 그러니 내가 어떻게 재혼할 수 있겠나’
최태민의 딸 이름이 최순실인데 첫 이혼한 20대 후반때 이미 압구정동 중심상가지역에 수백평대의 토지와 건물을 소지했다. 그렇게 압구정동에서 초이종합학원 및 초이유치원 원장, 한국아동교육문제연구소 소장을 하다가 아버지 최태민의 비서였던 정윤회와 재혼하였다.
그리고 그 정윤회는 96년부터 2002년까지 박근혜 비서실장으로 있다가 지난 2007년 대선때는 역시 박근혜 비선단체인 "강남팀"을 운영했다.
이같은 사실을 지난 한나라당 예비 대선후보 경선때 이명박이 폭로하니 박근혜는 90년대 이후 최태민 목사와 연락 되지도 않고 사망사실(최태민은 94년 사망)도 몰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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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7개, 부인 6명, 승려 목사 ‘최태민 미스터리’ |
등록 : 2012.07.17 19:01 수정 : 2012.07.1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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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대한구국선교단 야간진료센터를 방문, 최태민 총재(오른쪽)와 얘기를 나누는 장면. 가운데는 박근혜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 |
2012 대선주자 탐구|박근혜③ 박근혜와 최태민
지난 40년 가량 박근혜(60)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최태민(1912~1994)과의 관계에 대한 의혹이 자주 따라붙었다.
1974년 어머니 육영수가 총탄에 쓰러진 뒤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하던 박근혜는 ‘새마음봉사단’을 대외활동의 중심으로 삼았다. 최태민과 함께 운영했던 단체다. 사이비종교 ‘교주’였다는 설도 있어 최태민의 전력이 불분명하던 터에, 아버지 박정희도 20대의 딸이 그에게 현혹됐다고 생각해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80년대 후반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대외 활동을 재개한 박근혜는 최태민과 함께 새마음봉사단의 후신인 근화봉사단을 꾸린다. 동생 근령(58)과 대립했던 1990년 육영재단 분란의 배경에도, 최태민과 그의 딸 최순실(56)의 전횡 논란이 있었다.
1998년 국회의원이 된 뒤에는, 최태민의 사위(최순실의 남편) 정윤회(57)가 비서실장이란 호칭을 달고 등장한다. 2004년 박근혜가 당 대표가 되면서 정윤회는 종적을 감췄지만, 2007년 경선 때도, 지금도 그가 박근혜의 비선 조직을 이끌며 핵심 측근으로 활약중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유신말기 새마음봉사단 함께 운영
교계에선 “사이비” 구설수
“부인 6명·이름 7개”
박 “의혹 제기됐지만 실체 없었다”
■ ‘6명의 부인, 7개의 이름’
최태민은 흔히 목사로 불린다. 1975년 4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뒤부터 생긴 호칭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와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를 거치며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수사자료’를 보면, 그는 불교 승려가 된 적도 있었고 천주교 세례를 받기도 했다. ‘태민’이란 이름도 각종 가명을 포함해 7번째 이름이다.
1912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최태민은 1942~45년 황해도경의 순사였다. 해방 뒤 남쪽에 둥지를 튼 그는 이름을 상훈으로 바꾸고 강원도, 대전, 인천에서 경찰로 일했다. 이후 최태민은 군으로 자리를 옮겨, 육군과 해병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일했다.
최태민은 1951년 군을 떠나며 이름을 봉수로 바꾸고,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 등을 지냈다. 전쟁이 끝난 뒤 1954년엔 김아무개씨와 결혼했다가, 김씨가 그를 여자 문제로 고소하자 부산 금화사로 도피했다. 곧장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고, 이름을 퇴운으로 바꿨다. 1년여 뒤 김씨와의 문제가 잠잠해지자 산에서 내려와 부산에서 전 부인 임아무개씨와 다시 결합했다. ‘수사 자료’는 임씨가 5번째, 김씨는 6번째 부인이라고 표기했으나, 1~4번째 부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월간조선>(2007년 7월호)은 별도의 자료를 인용해 최태민이 6명의 부인으로부터 모두 3남6녀를 두었다며 가계도를 제시한 바 있다.)
임씨와 결합한 뒤 경남 양산에서 개운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한 최태민은 2년 만에 교장을 그만두고, 이후 몇가지 직책을 지냈다.1965년엔 천일창고라는 회사의 회장으로 있다가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서울지검이 그를 입건하자 도피했다. 도피중이던 1969년엔 공해남이란 가명으로 등장해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기도 했다.
70년대 들어 최태민은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였다.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종합했다는 교리를 내세웠고, 방민이란 가명을 쓰면서 ‘원자경’, ‘칙사’ 또는 ‘태자마마’라는 호칭을 자처했다.
■ 박근혜와의 만남
최태민이 박근혜를 처음 만난 것이 이 무렵이다. 최태민은 1974년 육영수 사망 직후 박근혜에게 편지를 보냈다. <김형욱 회고록>은 편지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 주기 위해 길을 비켜 주었다는 것,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 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이른바 ‘현몽(죽은 이가 꿈에 나타남)’이다. 최태민은 이를 부인했다.그는 <가정조선>(1990년 10월호) 인터뷰에서 “‘현몽’ 등의 말이 대학 교육을 받은 박(근혜) 이사장에게 먹혀들 것 같아요?”라며 “‘현몽’이나 정식으로 접견 신청 내용 따위는 쓰지 않았다. ‘위로 말씀을 전하며 기회 있으면 한번 만나주시길 바랍니다’는 말로 끝맺었다”고 말했다. 박근혜도 현몽설을 부인했다. 어쨌건 박근혜는 1975년 3월6일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최태민은 외부 활동을 적극 권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근혜를 만난 뒤, 최태민은 목사 안수를 받는다. <월간중앙>(1993년 11월호)은 “(목사 직을) ‘돈 주고 샀다’는 것이 교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나 이 사실이 확인된 적은 없다. 분명한 한가지는, 목사 안수는 받았지만 신학대학이나 교단이 인정하는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는 점”이라고 전했다. ‘태민’이라는 ‘마지막 이름’을 얻은 것도 이 즈음이다.
최태민 목사는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한다. 5월 임진강에서 연 ‘구국기도회’에는 2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박근혜도 참석했다. 최태민의 즉석 제안으로 박근혜는 명예총재로추대됐다. 이후 박근혜는 구국선교단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1976년 구국선교단은 ‘구국봉사단’으로, 2년 뒤인 1978년엔 다시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꾼다. 바로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경력의 핵심인 새마음운동의 본산이다.
최태민에 대한 ‘수사자료’엔 “형식상 모든 업무는 박근혜가 관장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비공식 고문격인 최태민이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봉사단 관계자는 “한마디로 미니 청와대였다”고도 했다. 최태민 주위에선 각종 이권 개입과 횡령, 사기 및 융자 알선 등 권력형 비리, 그리고 온갖 여성과의 스캔들 의혹이 들끓었다.
소문은 박정희 전 대통령 귀에도 들어갔다. 민정비서실과 중앙정보부 보고를 잇따라 받은 박정희는 1977년 9월 직접 최태민을 심문했다. 이른바 ‘친국’(임금이 직접 죄인을 심문함)이다. 대통령 서재에서 진행한 친국엔 중정의 김재규 부장과 백광현 국장이 동석했다. 박근혜도 참석해 “그런 일 없다”며 최태민을 옹호했다는 설도 있다. 박정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검찰에 넘긴 뒤 검찰 판단에 따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최태민은 새마음봉사단의 명예총재(총재는 박근혜)를 맡는 등 10·26 때까지 박근혜의 옆을 지켰다.
‘박정희 친국’ 뒤에도 살아남아
전두환 시절도 육영재단 등 활동
박 “어머니 돌아가신뒤 힘들었을 때
바로설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
■ 10·26 뒤 합수부 조사받고도 박근혜 곁에
10·26 뒤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최태민을 언급한다. “본인이 결행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총재 최태민, 명예총재 박근혜양으로 되어 있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이며, 본인은 최 목사의 부정행위를 상세히 조사해 박대통령에게 보고했지만 박대통령은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을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최태민 목사를 명예총재로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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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박근혜(오른쪽)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가 최태민 목사와 함께 구국단체결연 단합대회에 참석한 장면. |
최태민은 합수부가 진행하는 수사를 받는다. 전두환의 지시로 수사를 맡았던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신동아>(2007년 6월호) 인터뷰에서 “(최태민을) 강원도로 보내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용하게 자숙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강원도에 그리 오래 두지는 않았다. 구체적 비리 혐의는 기억나는 것이 없고, 그가 기업체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으로 확인된 게 얼마나 되는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박근혜의 연루 의혹은 없었다.”고 말했다. 새마음봉사단은 1980년 11월 강제해산 당한다.
박근혜는 육영재단과 영남대 등을 통해 사회활동을 이어간다. 최태민도 다시 등장한다. 박근혜는 1983년 1월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3년 뒤 1986년부터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에선 최태민의 전횡이 입길에 올랐다.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를 보면, 최태민에게 우선 보고를 해야 이사장(박근혜) 결재를 받을 수 있었으며, 최태민의 5번째 딸 최순실도 회관 운영에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무렵 재단 잡지사 기자들의 파업과 직원들의 농성도, 모두 ‘외부 세력’이라고 표현된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간섭이 원인이 됐다. 분란은 1990년 11월15일 박근혜가 동생 근령에게 이사장직을 넘길 때까지 계속됐다. 물러나는 박근혜는 “내가 누구에게 조종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며 최태민의 전횡 의혹을 일축했다.
최태민은 이후 서울 역삼동 자택에 칩거한 것으로 전해지며, 1994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94년 노환으로 세상 떴으나
5번째 딸의 남편 정윤희씨
박 ‘미래연합’ 창당때 비서실장
최태민, 사후에도 여전히 ‘그림자’
■ 대이은 ‘충성’
최태민 사후에도 그의 그림자는 박근혜 곁에 남았다. 최순실의 남편 정윤회가 박근혜의 정계 입문 때부터 등장했다. 그는 ‘비서실장’으로불렸다. 2002년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을 때도 자리를 지켰다.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표가 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 2004년 6월~2006년 5월에는 국회 입법보조원으로 등록했다. 박근혜의 정치 입문 초기에 정윤회와 여러 차례 직접 만났던 한 전직 기자는 “최순실은 박근혜가 장충동에 살던 시절부터 말동무로 지낸온 것으로 들었다”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박근혜 의원실의 보좌진을 구성한 것도 정윤회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박근혜는 2007년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정윤회의 등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1998년 보궐선거에서) 대구 달성구에 국회의원으로 처음 나왔을 때다. 개인적으로 캠프를 차려 선거를 치르려니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상대 후보가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실세의 기세가 등등했고 위협적인 상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윤회씨가 돕겠다 해서 순수하게 도운 것이다. 그게 인연이 돼 국회의원 됐을 때 입법보조원으로…, 이후 당 대표 때 그만뒀다.”
2007년 7월 이명박 캠프에선 ‘박근혜의 국회 보좌진이 최태민과 친인척 관계다’, ‘박근혜 캠프의 홍윤식 전문가네트워크 위원장과 정윤회가 밀접한 관계다’ 등의 의혹을 제기했다. 전자에 대해선 해당 보좌진이 즉각 부인했고, 후자에 대해선 홍윤식이 최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지금까지 정윤회를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른다”고 말했다.
박근혜는 최태민에 대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힘들었을 때 흔들리지 않고 바로설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이라고 말한다. 각종 의혹에 대해선 “의혹은 많이 제기됐지만 실체가 없었다. 한가지라도 사실이었다면 내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겠나”라며 일축한다.
그러나 박근혜가 다시 대통령에 도전하는 오늘도 정윤회의 이름은 여의도를 떠돈다. 친박 내부에선 친박끼리 “내가 모르는 보고서가 올라간다”며, 정윤회 라인을 의심한다. 반대파는 박근혜나 친박의 결정이 이상하다 싶어서 또 정윤회 라인을 의심한다. <한겨레>는 각종 의혹에 대한 해명을 듣고자 6월부터 다양한 경로로 정윤회와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2007년 경선 시기부터 많은 기자들이 그를 만나고자 했지만 성공한 바 없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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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민 수사 자료? 1980년 전두환 지시로 수사…2007년 한나라 경선서 흘러나와 최태민 1990년 유일한 인터뷰 “이름 7개씩이나? 터무니 없다” | 최태민 |
최태민(사진)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육영재단 분규 때다. 당시 기사를 보면, 최태민의 나이가 69살, 71살, 78살로 들쭉날쭉이다. 그때까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는 방증이다. <월간중앙>(1993년 11월호)은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김재규가 항소이유보충서에서 10·26 사태의 한 동기로 최태민·박근혜씨의 관계를 거론하고, 그의 비행을 알고 있는 몇몇 사람이 ‘정리’를 권유하자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은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특별조사를 지시했다. 지금까지 그의 신상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대부분 당시 수사 결과에 근거한 것”이라며 최태민의 전력과 박근혜와의 관계를 다뤘다. 이 ‘수사자료’는 공개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가, 2007년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물위로 떠오른다. <신동아>는 2007년 6월 “중앙정보부가 작성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최태민 관련 수사보고서인 ‘최태민 관련 자료’를 최근 입수했다”며 그 내용을 상세히 전했다. 같은달 27일에는 당시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경선 후보였던 이해찬의 누리집 게시판에 ‘안기부’라는 이용자가 신동아 자료와 같은 제목의 피디에프(PDF) 파일을 올려놓았다. 최태민의 유일한 인터뷰인 <가정조선> 1990년 10월호에서, 그는수사자료에 대해 “1977년에 작성된 수사기록이다. 수사 결과 내가 기소된 뒤 기소중지되거나 불기소 등으로 처리됐던 게 아니라 아예 그냥 없었던 일로 처리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6번의 결혼, 7개의 이름’에 대해서도 그는, “이름이 7개씩이나 된다는 것은 터무니 없다”며, 해방 뒤 38선 이남으로 오면서 호적 정리가 되지 않아 이름과 결혼 기록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최태민 쪽은 1977년 9월 본인이 위출혈로 병원에 입원중일 때 사실상 병실에 감금된 상태에서 수사가 진행돼, 기록도 강압에 의해 작성됐다고 주장했다. 김외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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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남자 최태민 관련 위키리크스 미국 정부의 자료!! [34]
덮쳐보니 효도르 (neopart****)
공주의 남자 최태민.
박정희교의 광신도 조갑제가 월간 조선에 기고한 글을 보면
당시 박정희는 선우연 공보비서관에게
▲최태민을 거세하고 ▲구국봉사단 관련단체를 모두 해체하고 ▲최씨가 향후 박근혜와 청와대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하라는 세가지 지시를 내리자 박 대표는 낙담한 표정으로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트위터에서는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박근혜와 최태민
관련 미국 정부 측의 자료가 나와서 상당히 흥미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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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차남 김현철 "박근혜 사생활 충격 고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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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도 덮고 넘어갈 수 없는 "팩트인데 어떻게 정리가 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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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소리 | | ㅣ 기사입력 | 2012/07/16 [1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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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차남 김현철 전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이 박근혜의원의 사생활 의혹을 제기하고 나서 파문이 일고 있다. <월간중앙> 7월호에 따르면 김현철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한 뒤, 구체적 내용에 대해선 "사생활 부분이라고 뭉뚱그리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아버지 YS가 "많이 알고 계시다. 그것도 팩트를 알고 계시다"며, YS가 박근혜를 "부도덕한 인물로 본다"고 덧붙였다. 그는 "아무튼 오는 대선에서 야당이 많이 들고 나올 것"이라며 "일반 국민이 알아야 하는 것이니까. 그건 숨긴다고 덮고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확실하게 끝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사생활 논란에 휩쓸린 새누리당 박근혜 © 민중의소리 |
| 그는 "박근혜 본인도 2007년 경선 당시 한마디 했다. 'DNA 검사를 받겠다'고 말이다. 그 이상의 얘기들이 더 나온다. 나중에 그게 밝혀지면 그때는 이미 늦지 않나?"라며 "아주 상당히 엄청난 충격을 줄 것으로 본다"고 말해, 자신이 제기한 사생활 문제가 2007년 경선때 한나라당 후보위원회가 질문을 던졌던 '사생아 논란'임을 시사했다. 2007년 7월19일 후보청문회에서 '자녀가 있다'는 시중의 소문에 대해 묻자, 박 후보는 "내가 애가 있다는 말이 떠도는데 DNA검사라도 받겠다"며 "그래야 그 자식의 부모를 위한 길"이라고 답한 바 있다. 김 전 소장은 '확인이 된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박 전 위원장 주변에서도 그런 것들을 정리하고자 하는 데 정리할 수 없다. 팩트인데 어떻게 정리가 되나?"라고 장담했다. <월간중앙>은 이에 대해 "요즘은 더 구체적인 얘기가 나온다. 박근혜가 낳은 자식이 올해 30살 정도이며 일본에 살며, 야당에서도 접촉을 꾀한다는 설명까지 붙는다"고 정가의 풍문을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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