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면 신정3리 고읍 마을
신정리는 해제 면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대산을 등지고 응양, 신흥, 고읍 등 세 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었다. 조선시대 함평현 해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응양동, 신흥리, 고읍내, 정동을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으며 이중 신흥과 정동의 이름을 따서 신정리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응양, 신흥, 고읍, 신간, 양학 마을로 이루어졌다.
고읍은 신정3리에 속하는 마을로 해제면의 진산인 봉대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봉대산(烽臺山, 195m)은 조선시대 국가 방어의 통신수단인 봉화대와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을 안고 있는 유서 깊은 산이다. 2005년에 발견된 봉대산의 산성은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역사적으로 해제가 백제시대의 현치(縣治)였음을 입증해주는 여러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그중 토기류와 기와편은 백제시대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성의 축조방식 또한 백제시대의 기법임이 밝혀졌다(참고로 임치진의 축조방식도 같은 방식이다). 특히 기와 片에서는 官이라고 찍힌 무늬가 발견 되었는데 이런 기와는 현재의 군청에 해당되는 관청에 사용되는 기와이며 이 산성 내에 지금의 군청에 해당되는 관청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학자들은 말했다.
실지로 고읍은 옛날 백제시대의 읍치였음을 나타내주는 지명이다. 지명의 변천을 보면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면 古邑內里로 나오며 1917년 조선면리동 일람에서는 무안군 해제면 新川里 고읍내로 나오다 근래에 들어서 신정리 고읍으로 나온다.
문헌을 보면 해제면 일대에는 백제시대에 道際현이라 부르는 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현의 중심지가 고읍마을이라 여겨진다. 물론 이를 증명할만한 결정적인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부근에서 발견되는 백제와 신라시대의 각종 유물과 유적들, 그리고 고읍, 고읍내로 불려지는 지명과 함께 마을의 좌우측에 옛 토성으로 추측되는 정황을 보면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에 살구꽃이 많이 피어 杏花村이라 부르기도 했다. 또한 1915년에 이 마을(현재 이백두씨 집 주변)의 강학소에서 직원 3명으로 해제면 행정이 처음으로 시작되기도 하였다.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예전의 기와로 쌓은 담이 있었으며 지금도 마을 곳곳에서 토기와가 나온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전주이씨 양녕대군파의 해제 입향조이기도 한 李梅壽(1587-1657)이다. 조부인 이좌(1550-1597)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의 막하에서 싸우다 전사하자 부친이 난을 피하여 4형제를 데리고 몽탄면 학산으로 옮겨왔다. 그곳에서 형제들이 각기 분가하였는데 둘째인 매수는 1600년대 초에 이곳 해제면 고읍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예전부터 봉대산의 맥을 이은 마을에서는 큰 인물이 나온다는 말이 있었다. 해제면의 마을 중 봉대산의 기운을 제대로 받은 마을이 고읍 마을이다. 이 마을 위쪽을 웃골이라 하는데 웃골 위에는 봉대산의 맥을 마을로 이어주는 만서당 줄기가 있다. 그 맥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잘라버렸다. 해서 큰 인물이 나오는 대신 내리 4명의 불구자(언챙이)가 나와 주민들은 봉대산의 기운이 끊겨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마을을 중심으로 봉대산 자락에 차밭이 광범위하게 조성되었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차밭이 있었다고 하는데 봉대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다른 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마을 앞에 당산뫼라는 동산이 있고 그곳에 둘레가 3미터 70이 넘는 크기의 당산나무가 있다. 수형이 잘 잡혀져 있으며 수령을 측정컨대 입향조가 심었으리라 추정되는 나무이다. 당산나무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으며 매년 2월 1일에 거리굿을 겸한 당산제를 지낸다. 특징적인 것은 마을의 세대 중 7세대씩 조를 짜 매년 돌아가면서 당산제의 유사가 되어 행사를 치른다는 것이다. 또한 그해에 주민들 중에서 환갑이나 칠순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으면 돼지 한 마리씩 출연하여 동네 잔치 및 제의 비용에 쓴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삼강문이 없는 전주이씨 삼강비가 있다. 이곳에는 충신 이규동(1854-1909), 효자 이사준(1660 - ? ), 열녀 능성구씨(1880-1920)의 정신을 기리고 있으며 후손들이 1948년에 건립한 비이다.
이규동은 어려서부터 의로운 일에는 항상 앞장 섰으며 애국심이 강하였다. 1907년 정미7조약이 성립되어 군대해산령이 내려지자 지도와 망운 등 해안가에서 왜적이 들끓었다. 공은 해안을 방어하여 왜적을 물리쳐 공을 세우고 다시 함평으로 옮겨 의병활동을 하다 일경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능성구씨는 이규봉의 아내로 남편의 병환이 위급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남편의 목숨을 3일간이나 더 살게 하였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부인은 끝까지 수절을 해 집안을 일으켰다. 효자인 이사준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이 마을에는 일제강점기 의병활동을 한 또 한 사람이 있다. 김종성(1906 - ?)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운과 용맹이 뛰어나고 재주가 비범하였으며 어른과 같이 의젓하였다. 19세에 일본인으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하고 왜 우리나라가 일본의 속국이 되어 수치스러운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생각하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어 보겠다고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당시 일본 천왕이 오오사카에 온다는 말을 듣고 군중 속에 칼을 품고 있다가 천왕을 향해 돌진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경에게 잡혀서 옥고를 치뤘다. 감옥에서 풀려 나서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갖은 옥고를 치루다가 병을 얻어 생을 마쳤다.
48세대 10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참고로 주민들이 지은 고읍마을 관련 노래를 정리해 올린다.
古 邑 歌
봉산의 정기 짙은 이곳 고읍은
백제의 후예들이 터하여 온곳
행화의 향기 속에 두견새 울고
녹음 아래 태평가 끊임이 없네
짙어가는 홍엽 속에 가을이 지니
무릉도원 따로 없다 바로 여길세
시대의 바람물결 사날지라도
봉사와 상조정신 변함이 없네
충효사상 상하없이 옛과 같으며
근농정신 날이갈수록 더욱더 하니
오늘 우리 진흥회의 깃발 아래서
힘차게 불러 보세 고읍의 노래
이 함 행 지음
고읍에서 살어리났네
웃골 아래데미 까끄매 놀러다닌 골목마다 기와돌담
시누대밭 돌고돌며 숨바꼭질 하든 시절 거미줄로 얼킨 사연
땅굴 장덩굴 떵굴 범바우 더듬어서 봉대기 이여지굴
만서당을 낫들고 갈쿠메고 괭이들고 지개통발 두들면서 나무하다 반나절!
밥 한 그릇 딸꾹 해치우고 황소끌고 깔 베러 나가세!
둠벙뱀이 효행이 분두굴 큰생기로 모심기 품 앗아서
우장입고 짚 토매 맨발에 털매신 미끄럽다 조심해라!
임치가레 분두굴 너른 밭에 콩심어 메주 쑤고
네리길이 고래밭에 두엄내어 보리갈아 배불이 먹어보세!
아매기 당사뫼 호헤이 둠벙뱀이 논 초벌 두벌 매고
아주메기 맘들이에 소등타고 굿치고 장구치며 당산을 돌아와서
폿죽 두어그릇 신김치에 막걸리에 이만하면 천하통일!
웃골 설에밭에 목화 수수 김매든 아낙네들 땀에 젖은 무명 치마
적삼 웃사니 굴엉목 서답하여 빨아걸고 어둠이 짙어지면
미역감고 씻어내어 님찾아 허둥바둥 님과함께 골방에 몸을 푸네!
황장밭 아랫뫼에 떼꽁치다 연띠다 땅뺏기 제기차기
대보건너 더너물로 참외 서리가세!
모깃불 대보뚝에 모여앉은 우리동무 기타치며 노래하다
버던 논 바닥 깨로 소나기 온다 물데러 가자!
웃배기 아래골 크고적은 산밭에 무 배추 심어키워 또뜨래미 네리가리
샛길따라 돌개 바다물에 김장김치 씻어다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맘근김치 따순밥 한 그릇에 막걸리나 마셔보세!
고읍에 얽힌 지명
버턴, 땅골, 범바위, 분두골, 호해이, 아매기, 웃사니, 당산뫼, 고래, 네리가리, 웃골, 이야지굴, 황정밭, 아래대미, 너란, 굴엉목, 만세당, 설애, 돌게, 또뜨래미, 개창, 똘건너, 까끄뫼, 독뱅이, 따박애, 큰생기, 더너물, 대보둑, 장덩굴, 임치가레, 둠벙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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